유학 시장이 얼어붙었다고 한다. 숫자를 보면 맞는 말이다. 한국교육개발원 교육통계연보에 따르면 2006년 3만 명에 육박하던 조기유학생 수가 2007년 2만7668명으로 꺾이기 시작하더니 2011년 1만6515명으로 줄었다. 거의 반 토막 난 셈이다.
하지만 교육적 성과가 기대에 못 미쳐 유학 수요가 줄어든 것인지에 대해서는 유학업계 내에서 의견이 갈린다. 조기유학 업체인 세쿼이아그룹 박영희 대표는 “최근 유학생 숫자는 줄었지만 만족도는 과거보다 더 높다”고 말했다. “침체기가 아닌 성숙기”라는 것이다.
조기유학이 늘기 시작한 2000년부터 유학생 수가 정점을 찍은 2006년까지 이어진 엄청난 유학 행렬에는 부모 강요에 등 떠밀려 가는 아이가 적지 않았다. 분명한 목표가 없다 보니 조기유학 실패자로 낙인찍인 채 귀국해 유학 붐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유학원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다르다. 박 대표는 “성향과 비전을 정확히 파악해 이에 가장 잘 맞는 교육 시스템을 찾아 유학을 떠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유학 시장은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유학닷컴 홍지윤 실장은 2013년 현재의 유학 트렌드를 양극화라는 한마디로 표현했다. 유학을 갈 수 있는 부유층과 그렇지 못한 빈곤층으로 나뉜다는 말이 아니다. 유학을 가는 사람 중에서 양 극단으로 갈린다는 거다. 무슨 말일까.
대학까지 염두해 둔 보딩스쿨
자녀가 중·고등학교 때부터 연간 학비가 4만 달러가 넘는 미국이나 영국의 사립 보딩스쿨(기숙학교)에 보내는 명품 유학이 양극단의 한 축을 이룬다. 또 다른 유형은 6개월에서 1년간 필리핀 등으로 단기 유학을 보내는 수요다. 짧은 기간에 영어 실력을 쌓은 후 한국으로 돌아오겠다는 실속파다. 필리핀 영어 캠프 비용은 1년 기준 2만5000달러 수준이다. 중상급 미국 보딩스쿨의 1년 학비가 3만 달러 수준임을 감안하면 적은 비용이 아니다. 하지만 주로 사교육에 열심인 대치동 엄마들이 선호한다. 한국식 관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필리핀 영어 캠프의 목적은 영어 습득이지만 사립 보딩스쿨을 보내는 학부모의 목표는 다르다. 박 대표는 “미국 사립학교는 학교장의 교육 이념에 따라 자율적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커리큘럼이 학교마다 다르다”며 “아이 성향에 잘 맞는 학교를 고른다면 적응도 쉽고 학습 능력도 쉽게 끌어올릴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말했다.
최근 학부모 관심이 가장 많이 쏠린 분야는 음악·미술·체육 등 예체능 능력을 키울 수 있는 학교들이다. 지난해 미국 보스턴의 월넛힐 예술고등학교로 고1 외동딸을 유학 보낸 최모(45·서울 동부이촌동)씨는 “미국에서 유서 깊은 음악대학인 뉴잉글랜드 컨서버토리 교수진에게 직접 레슨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 학교를 고른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월넛힐과 인터라켄아트스쿨(일리노이)을 놓고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첼로를 전공하는 딸아이에게는 정통 클래식 분야가 더 강한 월넛힐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이 학교 학비는 연간 4만8425달러(2012년 기준) 수준으로 고액이다. 하지만 최씨는 “한국에서 사교육 받을 때보다 돈이 적게 든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정기적인 레슨비는 물론이고 대회 한 번 나갈 때마다 담당 강사에게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며 “유학을 보내고 나니 연간 학비를 한꺼번에 계산하고 나면 추가 비용이 전혀 없어 오히려 저렴하다”고 얘기했다.
중3 아들을 수영선수로 키우고 싶어 조지타운 프렙스쿨(매릴랜드)에 보낸 윤모(48·서울 평창동)씨도 “유학 비용은 별로 부담스럽지 않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수영 대회에 참가할 때는 수영장을 통째로 대관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고 훈련비며 대회 참가비 등을 코치에게 따로 지불하다 보니 정말 돈을 물 쓰듯 썼다”고 말했다. “조지타운 프렙스쿨은 학교 내에 실내 수영장은 물론 골프 코스, 육상 시설 등이 갖춰져 있고 방과 후에 스포츠 전문 강사에게 일대일 개인 트레이닝도 받을 수 있어 아이의 수영 실력이 부쩍 향상됐다”며 만족스러워했다. 또 “한국에서 운동선수는 학교 수업은 아예 못 받고 훈련만 하는데, 미국에선 정규 수업을 충실히 받으면서 훈련받는 효율적인 시스템이라 유학 보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아직은 생소하지만 밀리터리스쿨(군사학교)로 진학하는 경우도 있다. 김모(52·서울 구기동)씨는 2011년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던 고1 아들을 밀리터리스쿨인 카슨롱군사학교(펜실베이니아)에 보냈다. 카슨롱은 일반 학교 커리큘럼에 군사학을 추가한 학교다. 학생들에게 엄격한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난 2007년 여름 캐나다로 어학연수 떠나는 초·중생들.
학창시절엔 이렇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는 게 분명 장점이다. 그러나 한국 내 인맥 만들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귀국 후 직업 구하기 등에서 혹시 손해를 보지 않을까도 염려한다. 자녀 유학을 고민하는 많은 학부모가 망설이는 이유다.
하지만 보딩스쿨에 유학 보내는 학부모 대다수는 자녀가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김씨는 “현지 보딩스쿨에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대학 진학은 물론 이후 커리어도 미국에서 꾸준히 쌓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국내 입시용 필리핀 단기유학
대치동 학부모가 보딩스쿨보다 필리핀 캠프를 선호하는 이유는 비용 때문만이 아니다. 샤론코칭&컨설팅 이미애 교육컨설턴트는 “사립 보딩스쿨을 보내는 부모는 유학을 통해 자녀를 글로벌 리더로 키우는 게 목표지만, 필리핀 캠프는 아이를 한국형 엘리트를 키우려는 엄마의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단기 유학을 통해 영어 실력을 바짝 끌어올린 뒤 한국에서 국제중과 특목고에 진학시키는 게 목적이라는 얘기다.
한국인이 많이 가는 필리핀 캠프의 커리큘럼도 한국식 영어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을 수 있도록 꾸며 있다. 오전 7시에 기상해 오후 11시 잠들기까지 현지 영어 강사와 함께 말하기·듣기·읽기·쓰기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영어 몰입 교육을 받는다. 자연스럽게 영어환경에 노출돼 말하기를 배우는 게 아니라 단어·숙어 암기, 발음 교정, 문법 수업, 영어 소설 읽기, 에세이 쓰기 등 한국 학원에서 하는 주요 학습 내용을 그대로 따라 한다. 목적이 입시다 보니 필리핀 영어 캠프에서는 수학 수업을 병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차피 1년 이내에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학교에 적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수학 진도가 뒤처지지 않도록 수학 선행학습도 빼놓지 않는 것이다.
목적이 뚜렷하니 만족도가 비교적 높다. 지난해 필리핀 영어 캠프에 참여했던 서채린(오륜초6)양은 “필리핀에 다녀온 뒤 대치동의 유명 영어학원 레벨테스트에서 최상위반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서양은 유학 전 이 학원 레벨테스트 통과는 꿈도 못 꿨었다. 학교 영어 수행평가는 당연히 만점이다. 서양은 “매일 9시간씩 영어 수업을 받고, 쉬는 시간에도 영어로만 대화해야 하는 환경이라 실력이 늘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학부모 김자경(40·분당)씨는 “아이를 한국에서 특목고에 이어 SKY 명문대(서울대·연세대·고려대)에 보낼 엄마라면 미국이나 영국 유학보다 필리핀 캠프가 훨씬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치동 영어학원 레벨테스트에서 미국에서 오래 살아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를 하는 아이보다 필리핀에 6개월 다녀온 애가 훨씬 높은 레벨을 받는 게 현실”이라며 “특목고 합격의 바로미터인 유명 어학원에 아이를 밀어넣기 위해 필리핀 캠프를 찾는다”고 말했다.
세쿼이아그룹 박 대표는 “이제는 유학생이 귀했던 과거와 달리 유학을 다녀온 경력 자체가 주는 프리미엄은 없다”며 “지금 자녀 유학을 꿈꾸는 학부모의 고민은 유학을 통해 아이가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따지기 때문에 실수가 적고 성과가 크다”고 설명했다.
불과 7~8년 만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조기유학을 놓고 실익을 따지지 않았다. 또 자녀 성향에 맞는 학교를 찾기보다는 유명 학교나 아이비리그 진학률을 기준으로 유학지를 선택했다. 학벌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특성이 유학 시장에도 고스란히 반영돼 유명 학교 간판을 갖기 위해 유학을 선택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국제중-특목고-SKY로 이어지는 끝없는 경쟁에 적응하지 못한 자녀에게 유학을 통해 경쟁력을 안겨주겠다는 심리였다.
한때 커뮤니티 칼리지 유학이 인기를 끈 것도 이런 맥락이다. 커뮤니티 칼리지는 우리나라의 2년제 전문대와 비슷한 학교다. 그 학교가 좋아서 유학 보낸 게 아니라 커뮤니티 칼리지를 졸업한 뒤 UC버클리나 UCLA, 스탠퍼드 등 유명 대학으로 편입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학닷컴 홍 실장은 “커뮤니티 칼리지는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졸업증만 있으면 쉽게 입학할 수 있어 명문대 진학에 실패한 고교생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유학 시장에서 확 줄어든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라고 짚었다. “외국 대학 출신이 한국에 돌아왔을 때 국내 대학 출신에 비해 특별히 더 잘난 게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외국 대학 학벌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좋은 학벌에 대한 욕구만큼이나 강력한 유학 동기가 원어민 수준의 영어 실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2000년대 초반 조기유학 대열에 자녀 등을 떠밀던 학부모 중 대다수는 “영어 하나만 똑 떨어지게 배워오면 들인 돈이 하나도 안 아깝다”고 입을 모았다. 2000년 두 자녀와 부인을 캐나다에 보내고 기러기아빠 생활을 시작한 조영강(56)씨도 이런 케이스다. 그는 “캐나다에 온 가족을 다 보내고 나 혼자 고시원에서 지냈다”며 “외롭고 처참한 기분이 들다가도 고시원에서 캐나다에 있는 가족과 인터넷 화상 통화를 할 때 아이가 원어민 발음으로 영어를 술술 읊어대면 가슴 속이 시원해지고 힘이 불끈 났다”고 회상했다. “영어로 하면 욕을 해도 그렇게 예쁘더라”는 말도 했다.
하지만 모두 성공한 건 아니다. 조기유학을 떠난 아이 중에 갑자기 바뀐 환경 탓에 오히려 언어부적응자가 돼 부모 속을 태운 경우도 적지 않았다. 김유환(50)씨는 2005년 초등학교 6학년이던 아들을 데리고 뉴질랜드 오클랜드로 이민을 갔다. 김씨는 “아들이 어린 나이라 영어가 금방 늘 거라 기대했지만 적응을 못해 거의 1년간 아예 말문을 닫아버려 애를 먹었다”고 얘기했다. 아들의 일기장엔 온통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는 죽는다’는 글귀만 적혀 있었고 학교에선 ‘성대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는 소견서가 날아왔다. 김씨는 “애 교육시키자고 한국 생활 다 접고 이민까지 왔는데, 아이가 안 따라주니 코너에 몰린 것처럼 막막해 주체하기 힘들 만큼 화가 나 가정 생활도 엉망이 됐다”고 했다. 그는 “2007년 조승희 사건을 보면서 조기유학으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모국어를 잃어버린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닫게 됐다”며 “고심 끝에 아들만 다시 한국으로 보냈다”고 말했다.
유학 변천사 국제중·국제학교 문 연 후 조기유학 수요 줄어
조기유학은 1990년대 후반부터 수요가 늘더니 2006년까지 고공행진을 거듭했다.
이때 조기유학을 보낼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게 한몫했다. 99년 9월 16일 국외유학에 관한 규정이 폐지된 것이다. 과거엔 국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해외로 나간 남자 조기유학생이 18세가 되면 무조건 귀국해야 했다. 국외유학인정서와 유학특례확인서 등을 병무청에 제출해야 유학을 연장할 수 있었다. 무분별한 해외유학으로 인한 외화유출과 병역 기피를 막는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유학에 대한 법적 규제가 풀리면서 조기유학의 붐이 본격화했다.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다산초당)를 쓴 신명호(사학) 부경대 교수는 2006년 조기유학생 급증의 이유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등장에서 찾았다. 신 교수는 “2006년 유엔 사무총장에 임명된 반기문 총장의 이미지는 영어 신동이었다”며 “조기유학으로 영어를 마스터하면 아이를 글로벌 리더로 키울 수 있다는 부모의 믿음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2007년 유학이 줄어든 데는 국제중 개교가 역할을 했다. 98년 부산국제중, 2006년 청심국제중, 2009년엔 대원국제중과 영훈국제중이 차례로 등장했다. 유학 최대 목표인 원어민 수준 영어를 국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동시에 엘리트 코스를 밟는 격이니 조기유학의 매력적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결정타는 국제학교의 등장이다. 송도에 채드윅이 2010년 개교한 것을 시작으로, 제주도에서 2011년 NLCS-jeju와 KIS(한국국제학교), 2012년 BHA까지 차례로 문을 열었다. 우리나라에서 미국·영국·캐나다 등 외국 명문학교의 교육 서비스를 동일하게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진=김경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