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1번지’ 서울 강남. 그곳의 학력 수준은 최고일까. 본지가 과거 ‘8학군’이었던 강남·서초구의 전체 일반고 24곳의 201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을 분석했다. 비교 대상은 비(非)서울 지역 일반고 중 상위 10% 안에 드는 106곳이다. 분석 결과 최상위권인 1등급 비율은 강남이 훨씬 높았다. 하지만 보통 상위권으로 불리는 2·3등급 비율은 지방이 월등했다. 과연 그 이유는 뭘까.
대입 재수생 유모(20)씨는 지난해 서울 강남의 한 고교를 다니다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치렀다. 중학교 때 전남 여수에서 서울로 전학온 유씨는 고등학생이 된 후 학교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다. “2학년 때 3학년 내용을 배우는데 선행학습을 하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할 정도였어요. 그러니 학교 수업이 의미가 없었죠.” 중학교 때 반에서 10등 정도 했다는 유씨는 “강남 학교에선 최상위권 위주로 수업을 하기 때문에 검정고시가 오히려 편했다”고 말했다.
‘강남’에만 가면 모두 공부를 잘하게 될까? 정답은 ‘아니오’다. 본지가 강남·서초구 24개 전체 일반고와 비서울 지역 일반고 상위 10%(106곳, 전국단위 선발 학교 제외)의 201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성적을 비교해보니 1등급은 강남이, 2·3등급은 지방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적으로 1등급은 전체 응시생 중 4%만이, 2·3 등급은 19% 정도가 받는다. 올림픽 메달에 비유하자면 강남은 금메달이 많지만 은·동메달은 지방보다 훨씬 적은 셈이다. 강남이 ‘SKY(서울·고려·연세)대’ 등 소위 명문대에 입학할 수 있는 최상위권(1등급) 학생층이 두터운 반면 수도권 4년제 대학에 입학 가능한 상위권(2·3등급) 학생은 지방에 많다는 얘기다.
언어·수리·외국어 표준점수 합계가 엇비슷한 서울 숙명여고(347.6점)와 경북 경주여고(346.1점)의 경우가 단적인 예다. 수리·외국어 1등급 비율은 숙명여고(16.3%, 22.1%)가 경주여고(8.5%, 5.5%)보다 월등히 높다. 하지만 외국어 2·3등급 비율은 경주여고(50.1%)가 숙명여고(39.5%)보다 훨씬 높다. 언어도 경주여고(48.6%)가 숙명여고(43.6%)보다 많다. 입시전문업체인 이투스청솔의 오종운 평가이사는 “강남 고교엔 최상위권 학생이 많아 학교 전체가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착시 현상’이 있다”며 “하지만 최상위권을 제외한 상위권이나 중위권 학생들의 실력은 지방보다 못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강남 24개교와 지방 일반고 상위 106개교 전체를 놓고 보면 수능 수리와 외국어 1등급 비율은 강남이 11.5%와 11.6%로 지방(9.2%, 6.9%)보다 높았다. 반면 2·3등급은 강남(수리 28.6%, 외국어 33.8%)이 지방(33.2%, 38.5%)에 못 미쳤다. 다만 언어는 1등급과 2·3등급 비율 모두 지방이 높았다. 강남에서 최상위권이 많고 상위권은 적은 이유는 뭘까.
“중학교 때 반에서 5등 정도면 다른 지역에선 내신 2~3등급을 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강남에선 4~5등급으로 내신이 밀리다 보니 보통 상위권 학생들은 강남을 꺼리게 되죠.” 휘문고 신동원 교감은 “입학 때부터 최상위권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중학교에서 전교 5등 안에는 들어야 강남에서 승부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늘교육 임성호 대표도 “1등급 학생들은 중학교 올라갈 때쯤 강남으로 많이 전학 온다”며 “오히려 강남 토박이 학생 중 4~5등급 밖으로 밀려 다른 지역으로 전학 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최상위권인 1등급 자원이 많아 그 아래인 상위권 학생들은 손해를 본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중위권 학생들의 성적을 끌어올려 상위권으로 진입시킬 수는 없을까. “강남에선 고교 평가 잣대가 SKY 진학 실적이에요. 1등급 학생 만들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익명을 요구한 강남의 한 고교 수학교사는 “학교의 모든 관심이 최상위권에만 쏠려 있어 4~6등급 학생들을 2~3등급으로 키우는 것은 강남에선 불가능하다”고 털어놓았다. 임 대표는 “요즘 강남 학교에선 최상위권 중에서도 상위 2% 이내 학생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 대다수 학생은 소외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성적 양극화’는 강남 학교들의 또 다른 문젯거리다. 하위권인 6~9등급(하위 40%) 비율은 언어·수리·외국어 3개 영역 모두 강남이 지방보다 높다. 특히 언어는 강남(25.3%)이 지방(12.2%)의 두 배가 넘는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강남의 한 고교 영어교사는 “영어 만점을 받는 아이들도 있지만 반에서 3분의 1은 간신히 알파벳만 쓴다”며 “성적 양극화가 심해 수업 분위기가 엉망”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지방에선 2·3등급도 우등생 소리를 듣지만 강남에선 1등급만 우등생”이라며 “상위권 학생들도 자존감이 낮아 학습 능률이 안 오른다”고 지적했다.
강남의 또 다른 특징은 수리·외국어는 잘 하는데 언어 실력은 떨어진다는 점이다. 언어 1등급 비율은 강남(8.9%)이 지방(9.8%)보다 오히려 낮다. 이에 대해 중산고 한주희 진로진학부장은 “영어와 수학은 어릴 때부터 선행학습한 효과가 수능에서도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압구정고 유미화 영어교사도 “해외 경험이나 사교육 등 영어를 접할 기회가 많은 학생이 강남에 많아 다른 지역보다 성적이 높게 나온다”고 말했다. 반면 언어는 선행학습만으로 좋은 점수를 얻기 힘든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다. 보성고 배영준 진로진학부장은 “언어는 사교육을 아무리 투자해도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며 “새로운 지문을 읽고 이해하는 사고력은 ‘족집게 과외’만으로는 키워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비록 최상위권은 강남보다 적지만 상위권이 두텁고 하위권 학생이 적은 지방 상위권 일반고들의 비결은 뭘까. 바로 맞춤형 수업이다. 경주여고는 경북도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오후 7~9시까지 영어·수학·논술 등 ‘명품수업’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최상위권 학생들을 위한 심화반, 기초가 약한 학생들을 위한 보충반 등 수준별 맞춤 수업으로 학생들의 실력을 끌어올린다. 반별로 10~15명이 수업을 듣고 학생들이 부담하는 비용은 없다.
인성교육도 중요하다. 천안고는 1~2학년 전교생을 대상으로 인성·진로교육에 중점을 둔 ‘햇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창의체험활동 시간을 활용해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거나 도서관·박물관 등을 찾아 견문을 넓힌다. 황춘배 교감은 “주입식 교육을 하기보다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왜 공부가 필요한지 마음으로 느끼게 해주면 스스로 공부를 시작한다”고 말했다.